바바라교수초청강연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상임대표 박원철)와 서울흥사단(대표 박인주)은 4월 19일(수) 오후7시, 흥사단 강당에서 46명의 단우 및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의 바바라 드링크(Barbara Drinck)교수의 “2차대전 후 독일의 배상 노력과 현재 일본의 인식”을 주제로 한 초청특강을 개최했다.

이번 특강은 서울흥사단에서 지난해부터 전개해온 일본역사왜곡 및도문제 야기 대응활동과 독립유공자돕기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제1회 정책토론회로 마련되었다. 현재 일본은 2차대전 후 독일의 국가 배상 노력과는 달리,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원폭 피해자, 난징대학살, 731부대 생체실험 등 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의 전쟁범죄에 대한 어떠한 반성이나 사과가 이뤄지지 않다. 오히려 독도 인근 배타적 경제수역(EEZ)침범, 노골적인 역사교과서 왜곡 등 일본의 국가정책은 우익세력 주도하에 평화헌법 개정, 천황제 부활, 자위대 해외파견 확대 등 패권적 군국주의를 부활시켜 가고 있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EEZ침범 및 독도영유권 분쟁 야기, 역사교과서 왜곡 등이 가속화되고 있는 시기에 이번 초청특강은 이러한 일본 정부의 패권적 군국주의 정책은 “반성하지 않는 역사인식”이 원인이며, 일본정부의 2차 대전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합리적 배상은 평화적 동북아시아 형성을 위한 시초라는 점을 독일의 2차대전 후 국가 배상의 구체적인 사례와 경험(서독 1980년까지 총 310억유로 개인보상 지급, 폴란드에 2500억유로 보상 등)을 통해 일본의 전후 보상에
대한 한국의 역할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었다.

바바라 교수 강연 자료

2차 대전 후 독일의 배상 노력
바바라 드링크(Barbara Drinck, 베를린자유대학 교수)

인간 역사상 제일 대규모이며 가장 끔찍한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선 일본의 중국침략과 유럽에선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이 두 나라는 전쟁 이래로 똑같이 큰 죄를 짊어지게 되었지만 이에 대한 양국의 태도는 매우 다르다.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인권 침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고, 이것은 도저히 보상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독일의 출발점이었다. 그를 기초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 뉘른베르크 소송(1945년 11월~1946년 10월), 아우슈비츠 소송(1964~1965) 같은 전쟁발발에 대한 재판들, 탈(脫)나치화 캠페인, 재교육 조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수많은 2차 대전에 대한 독일의 과오는 오늘날 학교수업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나름의 보상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제수용에서 자행된 장애인과 유대인의 대량학살은 보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1970년 12월 7일에 전 연방수상인
Willy Brandt는 무릎을 꿇음으로써 침묵의 사과를 했다.

NS(nationalsozialistisch, 국가사회주의, 나치) 정부의 파괴기구가 독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체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강제노동 시키고 사형시킨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NS 조치들은 인간성에 대한 큰 과오이다. 이러한 과오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독일은 보이려 노력하는 반면 일본은 그러지 못 하고 있다.

종전과 함께 독일은 연합국들과 피해보상에 대한 규정을 체결하였다. 보상 내용은 세계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으로 나뉜다. 개인적 보상은 각 개인에 해당하고 국제적 보상은 박해받는 특정 단체들을 대상으로 한다.

서독은 1980년까지 개인보상으로 총 31,000백만 유로(310억 유로)를 개인보상으로 지급했으며, 개인보상의 내용은 유족연금 10%, 신체 상해와 건강피해 보상 50%, 구직 27%, 자유침해 보상 5% 등으로 구성되었다. 오늘날조차도 36만명의 유족들이 210~510 유로의 연금을 받고 있다.

1947년과 1949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3개 승전국은 서베를린에 보상제도를 도입했다. 1949년 9월 독일연방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전 독일에 적용되는 규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개인에 대한 보상은 그리 포괄적이진 못 했다.

오히려 이는 독일의 과오시인에 대한 하나의 상징 이상을 의미하지 못 했다. 또한 보상규정에 의거하여 보상 지역은 독일공화국과 연관 있는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이 외에 독일의 현행헌법 출범 이후(1949년 5월 24일) 공산주의를 퍼뜨리려는 사람들 또한 엄격히 제외되었다.

박해받은 특정한 단체에 대한 보상은 1959년 3개 승전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 불평 위원회와의 협의를 통해 체결되었다. 1952년 이래 약 400억 유로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이외에 사는 유태인들에게 지급되었으며, 가장 큰 규모의 지급은 1968년까지 200억 유로가 지급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2500억 유로에 상당하는 규모이다.

1959년과 1964년 사이에는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그리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들과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특히 폴란드에게는 가장 큰 보상금액인 약 2억 5천만 유로가  지급되었다. 1989~90 통일 이후
새 연방주들에도 보상규정이 적용되었다. 이때까지 구동독(DDR)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과는 다른 방법으로 보상을 하고 있었다.

DDR는 형식상 주권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최고 행정상, 입법상, 사법상 기구는 소련의 국방기관이었다. 구소련에게는 구소련 지역에 자행된 파괴의 수리와 보수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그럼에도 DDR는 5만 여명의 나치스 박해자들에게 건강관리, 세금감면, 거주지 제공 등의 보상을 해주었다. 초기의 질적 빈곤으로 생존차원의 보상만 했던 것이 나중에는 연금까지 지불되었다.

이들은 특히 이른바“파시즘에 대항하는 전사”들이거나 파시즘의 희생자들이었다. 이 두 부류는 보상에 대해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를 언급하는 데에 있어 문화과학자인 Ruth Benedict의 유추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서구는 죄의 문화이며 일본은 부끄러움의 문화라고 한다. 서구의 경우 죄는 투명하게 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죄의식을 갖게 되며 일본의 경우 그들의 죄가 공개되었을 때에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일본이 이 문제를 직면하게 되면 그들의 죄를 시인해야 하기에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많은 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에 대한 전쟁을 ‘돌발사건’이라든지, 식민지국들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치부하는 등 그들이 저지른 행위의 의미를 축소하려고까지 한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과연 한국이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도 이러한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오사카 대학의 교수인 케니시 미시마에 따르면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시간이 흘러 희생국들의 원한이 줄어들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한다. 이 다수와 비판적 언론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존재한다고 한다. 일본은 종종 서구의 식민지 지배에 자신들을 비교하고 정당성을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잘못은 타국의 과오로 덮어지진 않는다.

종전 이후 니혼진론이라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일본에서 생겨났다. 이는 일본을 계급이 없는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보는 시각이며 이는 일본에 있는 모든 “외국적”인 것들을 억압함으로 순수한 일본을 만드는 과정이 가속화되었다. 이의 결과로서 일본의 여권을 가지고 있는 강제이민자들은 그들의 나라로 다시 쫓겨났다.

이상 보는 바와 같이 일본은 자국의 재건 이래로 그들이 저지른 죄목에 대한 죄의식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일본에서 전쟁을 야기한 게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기만 했다. 이는 자신들 스스로를 희생자로 인식하게 했다.

오늘에서야 일본에서는 그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아니라 ‘범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매우 극소수로, 대부분은 이러한 논쟁을 ‘자기학대’ 정도로 보고 있다. 일본의 비판적 여론은 아직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 『독일통일과정에서의 언론의 역할』에 대한 강연자료는 최근자료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